이건범 | 작가·한글문화연대 대표,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

 

 

 

볼썽사나운 짓을 하는 사람을 비웃을 때 쓰는 말이 있다. “병신도 급수가 있다더니, 꼴값을 떨어요.” 얄궂다. 나는 눈 병신, 시각장애인이다. 급수가 있다. 나는 1급이다. 1급이 가장 눈이 나쁜 사람이고 그로부터 6급까지 등급이 있다. 1999년에 처음 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시각 장애 5급으로 비교적 장애 정도가 가벼웠지만, 2005년에 1급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1급 판정을 받고 병원을 나서면서 두 가지 야릇한 생각이 나를 휘감았다. ‘흠, 이런 정도라면 정말 언젠가는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수 있겠네.’ 걱정이었다. ‘그런데 등급이 올랐으니 혜택도 늘어나겠는걸.’ 무슨 어려운 자격증을 딴 사람처럼 으쓱했다.

 

 

5급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나는 지하철을 공짜로 탔고, 국내선 여객기와 철도도 절반 요금으로 이용했다. 자동차를 새로 살 때엔 세금을 감면받았다. 주차료를 면제받거나 할인받는 경우도 있었다. 장애인 주차 구역에 편하게 차를 세우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치사하게 가짜 장애인 노릇을 하거나 장애인인 부모의 이름으로 차를 사서 혜택을 보려는 사람도 있긴 하다. 사실 몇 푼 되지 않는 혜택인데 말이다. 내가 1급을 받고 으쓱했던 까닭 가운데에는 혹시라도 나를 가짜라고 의심하는 눈길로부터 떳떳해졌다는 객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1급이 되어도 추가되는 혜택은 별로 없었다. 국내선 여객기와 철도를 이용할 때 보호자 한 사람까지 반액으로 깎아주는 정도였을까. 이런 작은 실망은 내가 장애인 등급 체계를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장애의 정도가 다르니까 사회생활에도 그만큼 어려움이 있을 테고, 그렇다면 사회 보장의 폭도 달라지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

없는 돈으로 살림을 하다 보면 지출 순위를 매겨야 한다. 우선은 먹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비와 추위를 막아줄 집이 있어야 한다. 벗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마지막이 걸칠 옷이다. 음식의 맛, 집의 넓이, 옷의 멋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렇듯이 가장 어려움이 클 것 같은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삶의 기초를 보장하는 원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나라에 돈이 넉넉하지 않다니, 없는 재원을 나누려면 장애의 정도에 따라 분배하는 게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겠는가? 여기까지가 누구에게나 존엄한 인간의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지 못했을 때 우리가 인간을 그저 하나의 생명체 정도로 보던 태도다.

광화문 지하철역에서 400일 넘게 장애 등급 철폐 서명운동을 벌여온 장애인들이 있다. 장애인인 나 역시 퍼뜩 의문이 들었다. 이게 어떻게 딴 1급인데 등급을 철폐하자는 말인가. 그러다 1년 전에 내가 장애인 활동 보조 제도를 신청할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지체 장애인은 3급까지인가 활동 보조를 신청할 수 있지만, 시각 장애인은 오로지 1급만 신청이 가능했다. 정말 병신도 급수가 있다는 말을 그 경계선에서 실감한 것이다.

들어보니 월 최대 17만원가량의 장애 연금도 1급부터 중복3급까지 소득이 적은 사람 순으로 차등 지급된단다. 확실히 병신도 급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험을 돌아보면 5급일 때나 1급일 때나 일반 문서를 읽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나처럼 아주 운이 좋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시각장애인이 일반적인 업무를 처리하기란, 거스름돈을 제대로 헤아려 주기란 다 어렵다. 돈을 벌기 어렵다는 말이다.

등급을 없애고 모든 장애인에게 장애 연금을 지급하라고 하면 당장 두 가지 질문이 나오리라. 재원은 어찌 마련하며, 돈 잘 버는 장애인은 어쩌냐고. 재원은 세금을 더 걷는 수밖에 없다. 사회복지세 같은 복지 목적의 세금을 걷어가면서 장애 연금 받는 폭을 전체로 넓혀가야 한다. 그럼 돈을 잘 버는 장애인에게도 연금을 주고 세금을 더 걷으면 된다. 보편 복지의 원리다. 찝찝한 질문이 하나 남는다. 왜 우리가 장애인에게 그런 투자를 해야 하느냐고. 답은 간단하다. 나도 내가 1급 장애를 갖게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Posted by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내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