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쉬운 말 지키는 시민운동, 현대판 '말모이'

 

 

이상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사무국장

 

요즘 색다른 '말모이'를 하고 있다. 올해 초 개봉해 인기를 모았던 영화 <말모이>처럼 말이다. 그런데 영화가 일제로부터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우리말을 모았다면, 나는 오히려 그 반대다. 날마다 보건복지부 보도자료를 보며 우리말이 아닌 어려운 외국어나 한글로 적지 않은 낱말들을 모으고 있다. 우리말을 지킨다는 목적은 영화와 같지만, 모으는 말이 다르다. '현대판 말모이'다.

 

현대판 '말모이'

 

지난 2000년에 출범한 '한글문화연대'는 우리말을 지키고 가꾸는 운동을 해왔다. 1991년 공휴일에서 빠진 한글날을, 다시 2013년부터 공휴일로 돌려놓은 단체다. 이 단체가 올해 초부터 18개 행정부처에서 내는 모든 보도자료를 조사하고 있다. 국어기본법 제14조 1항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를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 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잘 지키는지 보기 위해서다. 

 

정부 보도자료 같은 공문서에 쓰인 외국어나 어려운 말은 빠르게 시민들에게 전파돼 영향력이 크다. 'OO센터'나 '네트워크'처럼 한 번 널리 쓰이기 시작한 어려운 말을, 뒤늦게 우리말로 고쳐 쓰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571돌 한글날 축사에 이낙연 국무총리는 "정부가 먼저 반성하겠다. 공문서나 연설문을 쉽고 바르게 쓰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 올해 초 개봉해 인기를 모은 영화 <말모이>의 한 장면, 영화와는 달리 어려운 말들을 일일이 모으는 '현대판 말모이', 공공언어 시민감시단이 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현대판 말모이가 올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한글문화연대는 2012년부터 해마다 정부중앙부처의 석 달 치 보도자료 3000여 개를 조사하고 위반 실태를 알려왔다. 하지만 사정이 별로 나아지지 않자, 올해는 '공공언어 시민감시단'을 꾸려 연중 내내 조사하기로 했다. 올해부터는 조사 결과를 언론에 발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해당 공문서를 작성한 공무원에게 직접 '국어기본법 위반 통지' 공문까지 발송한다. 이러한 시정 요구를 무시하고 다시 법을 어긴 공무원은 한글문화연대 누리집(홈페이지)에 명단을 공개하고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할 계획이다. 한글문화연대 회원이기도 한 나는 시민감시단으로 참여해 보건복지부 보도자료를 조사하고 있다.  

 

중앙부처 보도자료 절반 이상이 국어기본법 어겨 

 

이 조사작업은 국어기본법에 따라 외국어 남용과 한글전용 위반이라는 두 가지 기준을 집중해서 보는 일이다. 1월 조사 결과를 보면, 18개 부처 756개 보도자료 가운데 절반이 넘는 53%가 국어기본법을 어겼다. 이렇게 법을 위반한 낱말은 1588개에 달한다(한 문서 안에서 중복사용 된 낱말은 하나로 친다).  

 

한글로 적긴 했지만 '글로벌' '인프라'처럼 외국어를 우리말 대신 남용한 사례는 보도자료 하나마다 평균 1.2회 나타났고, 가장 많이 남용한 부처는 산업통상자원부였다. 외국문자나, 한자를 그대로 사용한 한글전용 위반은 평균 0.6회였고 가장 많이 어긴 부처는 기획재정부였다. 

 

▲ 출처 : 한글문화연대(괄호 속의 숫자는 보도자료 1건마다 나타난 평균 횟수)

 

내가 조사를 맡은 보건복지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2월 11일부터 3월 21일까지 약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86개의 보도자료 중에서 총 180여 개의 외국어나 어려운 낱말을 찾아냈다.  

 

대표적으로 푸드뱅크(기부식품 제공사업), 바우처(이용권), 호스피스(임종 간호),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통합 돌봄), 헬스케어(건강관리), 웰니스(생활건강), 바이오 클러스터(생명산업단지) 등 어려운 외국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혹은 WHO(세계보건기구), MRI(자기공명영상), CT(컴퓨터 단층촬영),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GDP(국내총생산), Patient Safety(환자 안전) 등 영어 약자를 그대로 적는 경우다. 이는 SK, LG, KT 등 회사명을, 법인 이름이 등기된 대로 에스케이, 엘지, 케이티로 써야는 것처럼 한글로 먼저 엠알아이(MRI, 자기공명영상)라고 쓰는 게 맞다. 보도자료라는 공식 문서부터 쉬운 우리말을 써야 한다. 

 

변화는 생각보다 빨랐다. 처음에는 외국어 남용과 한글 전용 위반을 지적받은 공무원들이 "이런 걸 왜 나한테 보내느냐?"며 한글문화연대로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대부분은 국어기본법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면 "고소하겠다"는 거친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점차 달라지고 있다. 이전까지는 영어 낱말 '바우처'라고만 쓰던 것을 '이용권(바우처)'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건강관리(헬스케어), 지역사회 통합 돌봄(커뮤니티 케어)이라고 우리말을 먼저 쓰고 괄호 속에 외국어를 넣고 있다. 한글문화연대와 공공언어 시민감시단이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올 연말이 되면 얼마나 달라지지 궁금하다.

 

영어 용어에 소외되는 어르신들 많다  

 

나는 왜 이렇게 우리말에 집착하는가? 철지난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일까? 나도 한때 외국어를 우리말 쓰듯이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계 회사에 다닐 때는 조사만 빼고 거의 영어를 쓰곤 했다. 내부 보고서 또한 서식이 모두 영어로 되어 있으니 자연스레 영어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회사를 그만 두고서도 사람들과 말을 나눌 때 은근히 영어 좀 한다는 걸 뽐내려고 혀를 굴려가며 영어를 섞어 썼다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어머니의 한글 숙제를 도우면서 우리말을 왜 가꾸고 지켜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평생 학교 문턱을 넘어보지 못한 어머니는 뒤늦게 노인복지관에서 우리말과 글을 배우고 있다. 10년을 가까이 배웠지만 이름 석 자 쓰기까지 어머니에게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말조차 어려운 어머니에게 외국어는 더 어려운 말일 테다. 문득 어려운 말이 나와 어머니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령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오전에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통합 돌봄)' 신청하러 가야니까 '디지털미디어시티'역 몇 번 출구에서 만나요. 나오실 때 싱크홀(땅꺼짐) 조심하시고요"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어머니는 과연 몇 마디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비단 우리 어머니 뿐 만이 아니다. 동네 노인정을 다녀 보면 어머니처럼 외국어는 물론 우리말조차 어려워 하는 어르신들이 많다. 쉬운 말이 소통의 첫걸음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복지 혜택과 직결된 말들 

 

▲ 전철역이나 관공서 복지관 등에 비치된 심장충격기, AED나 자동제세동기라는 말을 보고 쉽게 심장충격기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글문화연대

 

또 말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도 직결돼 있다. 요즘 전철역이나 관공서, 복지관마다 심장충격기가 비치돼 있는데, 누구나 심장 마비를 일으킨 사람을 보거든 손쉽게 꺼내 쓰라는 용도다. 그런데 그 기기에 심장충격기 대신 AED(Automated External Defibrillator)라고 크게 쓰여 있으니, 이걸 보고 심장충격기인지 단박에 알아 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작게나마 한글로 적은 '자동제세동기'라는 말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실제 얼마 전 홍제역에서 출근하던 한 중년 남성이 심장마비로 쓰러지자 이 기기를 사용해 살린 예가 있었다. 당시 그를 발견한 사람은 다행히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직원이었기에 심장충격기를 쉽게 알아보고 꺼내 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려운 말 때문에 기기의 존재 자체도 몰랐을 일이다. 특히 보건복지부에서 새롭게 나오는 말들 중에 이처럼 국민의 생명이나 안전과 직결된 말들이 많다. 

 

어려운 말은 복지 혜택을 누리는 데 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복지용어가 가져오는 '낙인 효과' 때문에 부득이 어려운 말을 쓸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종종 나온다. 바우처(이용권)나 기초연금(노인연금)이 대표적이다. 노인을 '실버'로, 돌봄이나 수발을 '케어'로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격이다. 이런 말들은 뜻이 바로 와 닿지 않아 정체성을 숨기는 말들이다. 바우처로 이미 급식 서비스 등을 이용하고 있는 생활이 어려운 청소년이나 어르신들을 배려해서 쓴다고 치자. 그럼 어려운 말 때문에 이러한 서비스조차 있는 줄 모르거나 알아도 신청하는 게 어려운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야말로 공급자 중심의 생각이다. 이런 말들은 언뜻 복지 수혜자를 배려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또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시 나의 어머니의 경우를 보자. 집으로 날아온 기초연금이나 계절독감 백신 접종, 정기 건강검진을 안내하는 우편물을 보고 동사무소나 보건소, 가까운 병원을 찾아 신청하는 일들이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새로운 복지 서비스를 개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못지않게 중요하다. 복지용어부터 쉬운 우리말로 쓰자.     

 

(이상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사무국장은 한글문화연대 회원입니다.)

 

* 출처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34391#09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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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내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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